느림'을 생각하며...
제8회 현동 사공홍주 선생의 개인전에 즈음하여
명제헌明齊軒을 찾았을 때는 문 앞 작달막한 매화 한 그루가 이제막 매향을 터뜨릴 무렵이었다. 명제헌 주인의 손에 이끌려 집안으로들어서니 온통 묵향이 진동하였다. 지난 겨우내 주인이 쏟았을열기와 땀내도 물씬 풍겨 오는듯했다. 주인은 객에게 준비한 그림을하나하나 내보이고, 둘은 그림을 보며 숱한 얘기를 나눴다. 주인은객이 문외한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련만 느닷없이 화첩의앞글을 써 달라 하신다. 객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어떻게든발을 빼려 했지만 주인의 청은 막무가내였다. 그 동안의 인연갚음을 하라는 뜻으로 알고 어쩔 수 없이 청을 받아들였다.
명제헌 주인과 객이 처음 만난 것은 7, 8년 전 쯤 일이다. 이미 대구?경북 문인화단에서 중견의 위치에 있던 주인께서 예고도없이 객의 연구실을 들어섰던 것이다. 꽤 시간이 흘러 당시 나눴던세세한 이야기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주인이 객에게 말한요지는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나름대로 성실히 문인화의 외길을걸어왔다는 것과 요즘 들어 창작의 샘이 말라붙어 더 이상 앞길을찾지 못한 채 무력감에 빠져 있다는 것, 그리고 동양철학 공부를통해 어떻게든 한번 이 한계를 돌파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객은그야말로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 귀한 벗이란 생각에 주인과 굳은악수를 나누었고, 이후 둘은 거의 매주 만나 중국과 한국의 화론과서론이며 연구서들을 읽고 그림들을 완미하며 품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주인은 석사학위에 이어 마침내 <김정희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과예술세계>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명제헌에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는 가운데 주인은 몇 년 전동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던 것과 지난 해 박사학위를 받았던것을 자꾸만 의식하는 것 같았다.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했고, 한편 뭔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모두 당연한일이리라. 집으로 돌아와 객의 귓가에 맴도는 말은 ‘느림’이었다. 명제헌에서 객에게 몇 번이고 거듭 ‘느림’을 얘기했던 것을 보면, 주인은 지난 겨울 내내 ‘느림’과 씨름했던 게 분명하다. 이제주인이 품었던 ‘느림’이란 화두를 풀어보는 게 객의 숙제가 되고말았다.
만물은 동정動靜하는 가운데 존재하고 동정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하기에동정함은 만물의 존재 양태이자 존재 그 자체이다. 동만으로도, 그렇다고 정만으로도 만물은 존재할 수 없다. 동과 정은 단서가없으며, 시작이 없기에 끝도 없고 끝이 없기에 시작도 없다. 동하되 이미 그 가운데 정이 있고, 정하되 이미 그 가운데 동이있는 것이다. 이렇듯 만물은 동정을 통해 쉬지 않고 변해가지만결코 그 근원을 떠나지는 않는다.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것이다. 예술가에게 그것은 ‘느림’으로 감지되고, 그래서 주인은그 ‘느림’의 그림을 통해 끝없이 존재의 참 모습, 존재의 근원을더듬었던 것은 아닐까?
옛날 성리학적 세계관을 지녔던 문인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존재의근원을 탐색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여가와 여유로구체화하였으며, 거닒과 노닒의 삶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느림’의 삶이요, ‘느림’의 미학이다. 문인화의 정신이랄수 있는 ‘문자향文字香 · 서권기書卷氣’도 여기에서 배태되었을것이며, 추사가 그러했듯 ‘예술藝術’에서 ‘예도藝道’를 향한구도적 예술혼도 역시 이곳에서 배태되었을 것이다. ‘빠름’만이추구되고 존재 가치를 갖는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며, 주인은그들의 삶과 정신, 정취를 희구하면서 ‘느림’을 선택한 것은아닐까?
그러면서도 주인은 고민하고 또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문인 사대부가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에 있어서 문인화의 운명을. 주인은 다양한 몸부림을 통해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하였다. 주인은벌써 일곱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주인은 끊임없이 변신을 추구하여어느 하나 ‘실험적’이지 않은 게 없다. 화선지와 광목, 먹과안료, 채색과 무채색 사이를 오가고, 흙과 종이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그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되돌아보는여유를 가지려 드는 것 같다. 숨고르기일 수도 있겠다. 스스로의발걸음을 늦추어 되돌아봄의 여유를 갖는 것, 이것은 필경 완숙을향한 통과의례일 수도 있을 터, 여기에 또한 ‘느림’의 한 의미가있지 않을까?
명제헌에서 보았던 화선지 위의 그림들을 전시장에서 다시 만날날을 생각하니 잔잔한 기대감으로 다가온다. 그때면 그림은 주인의품을 떠나, 주인도 이미 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구도자의 구도행이그러하듯, 또 만물의 존재가 그러하듯, 예술가의 혼도 다시금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객은 누구나 예술가의 깊은 고뇌와 방황, 아픔을 기대하며 그의 작품 앞에 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2006. 4.
이훤怡萱 홍원식洪元植(계명대 철학과교수)